사각관계

Oct 8 - Nov 16, 2014

나진숙, 조원강

11:00 - 18:00 월요일 휴관

갤러리아쉬 헤이리

나진숙

사람의 풀(glue)


풀을 만들기 위해선 쌀로 밥을 만들고, 밥에 더 많은 시간과 열을 가해 형태가 사라진 후 풀죽이 되어야 한다. 어떤 것을 붙이고 잇기 위한 재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듯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번거롭고 긴 과정으로 생성된 풀이 주인공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풀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들의 아지랑이 같은 숙명이다. 오랫동안 뼈를 고아 만드는 감칠맛의 정수처럼 마지막에는 형체 없이 사라지며, 순간의 맛이 여운만을 남길 뿐이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몇몇 동물은 개별적인 삶을 꾸려가지만, 나약한 육체를 지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지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종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을 지닌 인간만은 더 많은 번영을 이루어왔다. 그 이유가 높은 지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우리는 서로서로 당기며 함께하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인고의 풀들을 쑤어갔을까… 현재의 영화는 보거나 만질 수조차 없는 위대한 인내를 견딘 연대감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나진숙의 풀(glue) 


나진숙은 레진(resin)이라는 접착제를 이용하여 작업한다. 하지만 레진을 어떤 개체에 또 다른 무엇을 붙이기 위한 접합의 풀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결과물로써 주목할 수 없던 레진 그 자체의 물성과 색, 그대로를 표현한다. 어찌 보면 태생의 한계를 뛰어넘어 쓰임을 받는 풀이며, 자신의 의미를 자체로써 보여주는 자립의 풀이 된 것이다. 그렇게 그에 의해 독립된 풀, 레진은 물감과 붓으로 할 수 없었던 표현을 보여준다.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법을 먼저 터득한 풀(resin)이기에 그 감(感)의 깊이가 진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반복의 인내심으로 쑤어가듯 접착제 분사기(glue gun)에 열을 가해 작업 하는 그를 떠올리면 작가와 재료는 같은 본을 지녔다. 그와 풀의 조화가 감미(感美)로울 뿐이다. 


살기 위한 모든 것


세상 모든 빛의 고향은 태양이다. 우리는 태양 빛의 반사를 기준으로 색을 나누고, 만들어간다. 단순히 색의 의미를 벗어나 생명의 합성과 흡수로 이어지는 길목의 반짝거림을 색이라 부르는 것이다.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몇 개의 어귀에는 이렇듯 빛이 존재한다. 


공기는 모든 생명의 증거이다. 나무가 내보내는 것을 우리가 마시며, 우리가 내쉬는 것을 나무는 마신다. 자연이라는 놀라운 순환 속에 무색무취의 기체는 무엇보다 뚜렷한 의미의 맑디맑은 투명성을 지닌다. 그렇게 맑은 공기의 색채는 빛을 만나 은빛으로 발한다. 


그리고 수(數)겹 


그의 작품 속 여러 겹의 레진은 공기를 품고 있다. 공기가 우리 삶의 중요한 영양분이듯 그의 작품 또한 공기를 호흡함으로 살아나는 작품이 된다. 작업의 순간순간, 그의 날숨이 작은 공기 방울이 되어 레진의 겹 속에 괴어 들어갔다. 겹의 간(레진의 공간)은 공기를 품고 있으며, 은빛이 은 스스로 발광하는 것이 아닌 공기와 빛으로 빚어진 색이듯, 그가 바라는 삶의 원리를 담아 빛의 모양으로 닮은 것일지 모른다. 함께하는 마음이 인간이라는 가치를 더욱 윤기롭게 빛나게 하듯…말이다. 


다문다답의 퍼즐


나진숙의 작품은 여러 개의 사각형들을 이어 붙여 하나의 형상(꽃, 원, 나무, 조개 등…)을 만들기도 하며, 서로가 다른 배열을 이루며 추상의 테를 창조해 나가기도 한다. 테를 만든다는 것은 어그러지며 깨지지 않게 묶어가는 것이다. 각 조각들은 의미 있는 다름으로 되살아난다. 퍼즐 큐빅 처럼 정해진 답은 우리의 인생 속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진숙의 작업은 여러 개의 조합과 구성을 바꾸어 가며, 다양한 답이 존재함을 일러준다. ‘다문다답’의 가능성, 그 다양성을 해답으로 담고 있다. 


볼 수 있는 곳의 사각, 볼 수 없는 곳의 관계(사각 관계)


보이지 않는 곳은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보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관객의 시선을 붙이는 그의 작업은 고정이라는 접착 재료의 특성을 물질의 접착이 아닌 감정의 접착으로 전이시켰다. 전이된 감정은 더욱 눈으로 보기 힘들어졌지만, 마음으로는 그 무엇보다 분명한 모습으로 우리를 붙잡아 놓는다. 작품 상호 간의 유기적인 연결뿐 아니라, 작품과 바라보는 이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까지도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어둠의 사각 속에서도 서로를 찾아낼 수 있는 관계의 불빛을 비추는 것이다. 


김승환             

조원강

사람의 끈(leash)


태어 날 때부터 모체(母體)와 이어져 있는 것은 생명 출발의 시작점이자,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의 공통점이다. 탯줄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각과 감정까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결박의 끈이 아닌 결속을 의미하는 살아 숨 쉬는 관계의 사슬을 뜻한다. 세상의 숨을 들이켜는 순간 끈은 잘려나가지만, 단 몇 달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된 끈이 더욱 굵고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본능과도 같은 관계연결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회 속에서도 우리는 최신의 매체를 이용하여 서로와 서로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와 텍스트를 넘어 영상에 이르기까지 다른 어떤 기술의 발전보다 먼저 통신기술이 발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유일지 모른다. 


태어나는 순간의 인간뿐 아니라 죽음으로 사라진 이도 관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종교와 관습 밖에서도 죽은 이를 기리며, 영혼에 관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만들어간다. 연결로써 삶을 시작하고…. 끝없는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조원강의 끈(leash) 


조원강은 캔버스 위에 개를 그린다. 개를 그리고, 사람을 그리고, 배경도 그리지만, 무엇을 봐도 캔버스의 주인공은 개일 수밖에 없다. 반려견으로서 ‘개’ 보다는 인간과 동등한 위치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부분이다. 사람의 신체는 부분만 나오고 눈빛을 볼 수 없지만, 개는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많은 그림 속에서 개와 사람은 끈으로 연결되어있다. 자신의 개를 제어 하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개와 사람 양자 모두 서로의 책임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의미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곳에 묶여 제한된 자유를 부여받는 것이 아닌 함께 움직여 줄 수 있는 친구와 연결되어 책임감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손을 잡거나 하여 함께 걸어갈 수 있지만, 몸집이 낮은 개들을 생각해보면 낮은 시선에 대한 배려의 손잡음 이다. 나아가 사람과 신뢰의 대상을 연결하는 유기적인 끈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그림 속 개끈의 팽팽함과 느슨함의 차이를 보면 서로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그저 편안한 이야기를 하듯 두 사이의 끈을 통해 다채로운 대화가 들린다. 주인에게 조건 없는 충성과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그들의 본능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기다려주는 주인 아니 친구가 있기에 가능한 믿음의 표현이다. 보이진 않지만,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는 담소이다. 


감정을 기억하는 방법 


그는 뉴욕 맨해튼 거리의 사진을 직접 찍고, 그 사진을 통해 작업한다. 그것은 당연히 이미지의 복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찰나의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다른 감정을 끌어내는 매개체와 촉매제라는 두 역할 모두를 하는 것이다. 사진을 통해 촬영 당시의 순간, 전체적인 맨해튼 거리 분위기와 기질적으로 예민한 뉴요커들이 개와 함께 산책하며 안정감을 찾는 모습을 떠올리진 않을까.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무한한 감성을 여는 열쇠의 역할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그의 작품을 보고 또 다른 영감을 얻어 낼 수 있듯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감수성의 화수분처럼. 무엇을 통하느냐는 것 보다는 감각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개를 추억하는 방법 


개를 추억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을 추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상대의 눈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이고, 표정을 기억하고 그들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조원강의 시점은 낮다. 아니 인간의 기준으로 낮은 것일 뿐 개의 시선에서는 적당히 편안한 구도이다. 이런 배경이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편견 덕분이다. 마음을 조금만 숙여 그의 작품을 보면 그 어떤 세상의 구도보다 안정된 구도를 발견할 수 있다. 개를 추억하는 방법은 그저 친구를 기억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소소하지만, 진실한 그의 프레임은 보는 이를 숙이게 한다. 


볼 수 있는 곳의 사각, 볼 수 없는 곳의 관계(사각 관계) 


보이지 않는 곳은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보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서 먹었던 무화과(無花果)처럼. 무화과나무는 그 이름이 의미하듯 꽃이 없는 나무가 아니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꽃이 없을 뿐이다. 보이는 것만 보아 왔던 우리의 작명 실력을 보여주는 예이다. 세상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지만, 조금만 상대를 이해한다면 많은 것을 볼 순 있다. 그렇게 시작되는 존중은 작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으며,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판(版)에 비로소 우리의 마음을 올릴 수 있다. 그림과 사람의 관계는 볼 수 없지만, 그것은 속까지 환희 비춰지는 맑음 때문이다. 짙고 탁한 어둠으로 인한 장막이 아닌, 선명한 투명함이 있기에 눈에선 보이지 않는 것이다. 


김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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